구건조 신부는 1917년 9월에 사제서품을 받고, 수원교회에서 보좌사제로 일하면서 예산교회에도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예산교회 약사에는 "같은 해 11월에 구건조 바나바 신부에 의해 여섯 명의 교인이 망세를 받았다"라고 나와있다.
또한 1925년 천안 부대동교회 관할사제를 맡을 때 예산에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산교회 약사에도 1925년
"이 당시에는 사제는 거의 상주하지 않고 부대동교회의 사제가 출장하여 성사를 집전했다"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구건조 신부는 예산교회의 처음 세례를 준 사제이자 20년대에는 출장 사제였던 셈이기도 하다.
구건조(바나바)사제 (1866-1932)
성공회 사제(司祭) 구건조(具建祖, Barnabas Kou)는1914년 6월 7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희준(마가)과 함께
부제(副祭) 서품을 받았고1917년 9월 21일 김인순(바나바)과 함께 사제(司祭) 서품을 받았다.
그는 1866년 1월 19일 강화군 불은면 신현리 55번지에서 구지희(具地喜)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서
한학자(漢學者)로 학문적인 조예(造詣)가 깊었다. 구건조(바나바)신부의 일생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66년 1월 19일: 경기도 강화군 불은면 신현리 55번지에서 아버지 구지희(具地喜)와 어머니 고(高)씨의 장남으로 출생.
한학자로 학문적 조예가 깊음.
*1901년: 강화읍교회에서 영세 받음.
*1906년: 온수동교회 전도사로 온수동 지방의 한학자 유지들을 전도함.
*1914년 1월: 강화읍 미가엘신학원 입학.
*1914년 6월 7일: 부제서품 받고 강화읍 미가엘신학원 강사로 시무함.
*1916년: 서울전도구 보좌부제.
*1917년: 사대성적(四大聖蹟) 저술.
*1917년 9월 21일: 사제서품 받고 수원교회에서 보좌사제로 시무함.
*1919년 10월: 강화읍교회 보좌사제.
*1921년 1월: 강화읍교회 관할사제.
*1925년 6월: 천안부대동교회 관할사제.
*1930년 7월 이후 Morning Calm의 성직자명단에서 사라짐.
*1932년 12월 15일: 66세를 일기로 불은면 신현리 고향에서 별세함.
구건조신부는 1930년 초에 사제직을 떠나
고향인 강화군 불은면 신현리로 돌아온 것으로 보이며
1931년 1월 13일 부인을 사별하고 1932년 12월 15일 그도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자료출처 (수당 한상복, 한수당자연환경연구원 원장)
1914년 6월 7일 구건조부제 서품기념사진(왼쪽)
오른쪽 주교성장을 들고 있는 사람은 김희준 부제이다 (성공회역사자료관
)
1917년 9월 21일 구건조사제 서품기념사진(왼쪽)(성공회역사자료관)
1917년 9월 21일 구건조사제 서품증서(성공회역사자료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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