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예산교회 초대 전도부인 '김동식 에스더'

대한성공회 예산성당 2018. 9. 3. 14:19

 

금주 주일은 대한성공회에서 지정한 '여성선교주일'이었습니다. 대한성공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도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분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지고, 또한 한국전쟁 이후 복구되지 못한 많은 교회를 지킨 것은 다름아닌 여성들이었습니다. 

아래 소개된 신문자료는 유명희 신부님이 신학생시절 인터뷰한 내용으로서 예산교회 초기 역사와도 관련있는 한 전도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남양주교회의 남우희 부제가 이 이야기를 토대로 주일설교를 하였기에 주보 글을 원문 그대로 올려봅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한 그분들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892(연중 22주일/ 여성선교주일) 설교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여성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하여 대한성공회를 오늘날까지 돌보아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께서 몸으로 삼으신 이 교회가 여성과 남성, 아이와 어른이 서로 짐을 나누고 생명의 샘물을 나누어, 안전하고 평등하며 존경어린 관계를 빚어가는 모범이 되도록 이끌어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여성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 (요한 4:5-30,39-42)

초기 성공회의 부흥은 이름조차 제대로 전하지 않는 전도 부인들과 수녀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수녀들에 관한 기록은 꽤 있습니다마는 전도 부인들에 관한 기록을 통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 부인은, 예전에 교회의 여러 가지 대소사를 주관한 여성 교역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에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여성이 맡되, 그러한 여성 교역자에게 성직서품을 하지는 않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죄송하게도, 그분들 이름도 생애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1990년에 나온 <대한성공회 백년사>에는 간신히 몇몇 분의 이름이 보일 뿐이고, 1998년에 나온 대한성공회 여성들의 이야기 <여인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조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다섯 분들의 생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박 유니스, 홍 살로메, 박 말가리타, 조 마리아, 원경희 미리암 안나, 김 애린, 최경주 힐다, 강 모니카, 최봉안 앵니다, 김규숙 마리아, 선우선부 헬레나, 에스더, 김 아가타, 김 나오미.

한분 한분이 다 소중하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는 우선 에스더님 한 분을 소개합니다. 어떻게 부를까 고민하다가 전도사님이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에스더 전도사님의 이름은 김동식입니다. 1897년에 성공회 집안에서 나서 자랐습니다. 집에 기도서며 성경이 있으니까 들여다보고 외우고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열 살만 넘어도 여아의 집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서, 주일에도 집에 혼자 남겨지곤 했습니다. 14살 나던 해(1911) 밤꽃이 필 무렵 용기를 내어 어머니께 성당에 가고 싶어요.”하니, 어머니가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는 말씀을 못 드려서 몰래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집에서 혹 성당 이야기가 나와도 관심없는 척했습니다. 성당도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다녔습니다. 이십리 길을 걸어서 가는데 피곤한 줄 모르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와 마주쳤는데 아버지 낯빛이 안 좋으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다니며 세례공부를 하고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잘 알지는 못해도, 성가에도 있듯이 세례받는 것이 신자에게 가장 기쁜 일임은 알았습니다. 열여섯 살에 교인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그로부터 11년 뒤(1924) 아들을 낳았습니다. 5년 뒤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32살이었습니다.‘세상에서 버림받았구나.’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까마득하던 중에 한 가닥 희망이 비쳐왔습니다. ‘하느님 사업을 하면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면 되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래, 이후로는 하느님 사업을 해야겠다.’ 하고 다짐하였습니다. 여자 신학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입학을 알아보던 중에, ‘구식 여자는 안 뽑는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낙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윤달용 신부님이 지원서를 내 보라고 하시길래, 냈습니다. 면접시험을 거쳐서 뽑혔고 서울대성당에 마련된 신학원에서 3년을 공부하였습니다. 학기 중에는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방학이면 바느질 집에 가서 일을 하여서 생계를 꾸리고 아들도 건사하였습니다.

마침내 학업을 마치고, 구 세실 주교님으로부터 예산교회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1932년 즈음이고 김동식 에스더 전도사님 나이 35살 때 일입니다. 교인들 심방하고, 세례 받을 사람과 견진 받을 사람들 모아서 교리공부 시키고 기도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신부님을 도와서 한 달에 한 번 거행되는 미사 준비를 철저히 하고, 교회를 청소하고 단장했으며, 예복 세탁과 성물 관리도 하였습니다. 큰 일 작은 일, 즐거운 일 궂은 일에 눈코뜰새없이 바빴습니다.

몇 년 후 평택교회로 발령이 나서 거기서도 열심히 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1941년 일본이 영국을 적대시해서 영국 주교님과 신부님을 다 쫓아냈는데, 그러고 나니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모든 게 막막해졌습니다. 그래도 집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전에 하던 대로 교인들 심방 다니고 하느님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이 몸을 전도 부인으로 부르신 분이 하느님인데, 이 소명을 어떻게 놓으랴 싶었지요. 아들 하나의 단출한 몸이니만큼 교회 일을 계속할 수 있었노라고 회고하신 바 있습니다.

5년쯤 지나 해방이 되었고, 전도부인 활동을 정식으로 재개하게 되려나 싶었는데, 교회로부터 아무런 지침을 못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아들을 따라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동식 에스더 전도사님은, 주일학교 때 가르친 아이들이 신부가 되는 것을 보면서 퍽 기뻤노라 하십니다. 또 아이들이 세례 성사, 견진 성사 받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고해 성사 뜻을 잘 받아들이면서 신앙이 성숙해 가는 것을 보는 일도 크나큰 보람이었다고 회고하셨습니다. 1990년에 돌아가시고, 그 아드님도 이제는 고인이 되셨고, 손주들이 천안 원성동 성당을 섬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샘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낯선 유대 남자와 맞닥뜨립니다. 둘 다 한낮에 우물가에 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연 많은 여인, 유대 남자는 저 변방 갈릴래아 출신으로 여행에 지친 상태입니다. 고단한 여성과 고단한 남성의 조우입니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한 하느님을 모시는 사이이면서도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것 아니라도 그 시대는 남녀가 유별해서 단 둘이 이렇게 대화한다는 것부터가 구설에 오를 일입니다.

두 사람은 사회적 금기를 어기고 놀라운 대화를 나눕니다. 사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과 어떤 사람이 깊은 흉중의 이야기를 긴하게 나누는 일로는 이 대목이 단연 최고입니다. 사마리아 여성과 유대 남성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한계단 한계단 끌어올립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성별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민족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진리로 하나됩니다.

이제 여인은 콸콸 샘솟는 물줄기를 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남들 눈을 피해서 타는 듯이 뜨거운 한낮에 샘물을 길러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해방된 것이지요. 행복감에 여인은 동네방네 모든 이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여기 참된 구원자, 생명의 샘이 있다고, 와서 보고 체험하라고, 예수님 앞으로 데려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이고 선교사이고 사목자입니다. 자신도 참된 삶을 찾았고, 이웃에게도 참된 삶을 찾아주는 이, 예수님의 참 제자, 참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성공회 역사의 여성 전도사 분들이 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후손들입니다. 우리는 이분들 덕택에 성공회라는 물줄기에 합류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남우희 엘리사벳 부제/ 성공회 남양주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