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선교와 대천덕 그리고 태백교회
개신교에서 강원도 태백이란 도시는 예수원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실 예수원의 역사는 60년대 성공회 대전교구의 탄광선교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공회 사제이셨던 대천덕 신부님은 김요한 주교님의 사회선교의 일환으로 강원도 태백의 황지 탄광촌 선교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강원도 황지선교는 성공회 사회 선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쉽게도 이 역사는 김요한 주교님의 자서전과 약간의 사진자료, 성공회 신문에 근거한 기록만이 있을뿐, 당시 선교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두 영국인 간호사의 의료선교나 이동진료소, 학교 교육, 젖소 분양 사업등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정리한 역사는 아직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것을 논문으로 정리해보려고 했으나, 당시 상황을 고증해줄만한 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
아래 태백교회의 역사를 보며 황지 선교의 발자취를 잠시나마 살펴보게 됩니다. 또한 많은 어려움속에서도 교회를 유지해나간 태백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합니다.
탄광선교로 설립된 태백교회
※ 본 글은 성공회 신문 300호 기념 특집으로 유명희 신부(성공회 기장교회)님이 작성한 글에 주명철 신부님(성공회 태백교회)이 덧붙여 작성된 글입니다. 자료의 출전은 태백교회 카페에서 옮겨왔음을 알려드립니다.
본 교회는 1962년 영국인 김요한(John Daly) 주교님께서 계몽의 집으로 시작하여 탄광선교라는 아주 특별한 소명을 담당하게 되었다. 초창기 7∼8년간은 광부와 그 가족들 그리고 탄광지역을 위하여 60년대 당시로는 소속교단인 성공회 뿐 아니라 전 기독교적으로 보았을때 획기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로 들어서는 격변기였던 4.19와 5.16 직 후 교회가 산업현장의 문제와 요구를 수용하면서 능동적인 참여자세를 취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였다.
태백교회의 설립자이시며 한국성공회 5대 주교이신 김요한 주교님은 한국도시산업 선교연합회의 초대회장을 지낸 바 있다. 김요한 주교님은 탄광을 사랑하시는 분이었다. 영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6년간 시무하신 첫 목회지가 영국의 광산지대인 "에어타일" 지역이었고, 그 후 아프리카 주교로 20년간 잠비아와 아크라 등에서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한국에 부임했을 때는 6.25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는 아주 어려운 상태였는데 전임지에서와 같이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려는 구체적인 활동을 위해서 한국의 대표적 광산지대인 황지(지금의 태백)에서 62년 탄광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주교님은 복지사업에 큰 비중을 두었다. 독신이었던 그는 영국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 한옥을 한 채 지어 "계몽의 집"으로 이름짓고 그곳에 실무자를 두어 사역을 시작하였다. 황지탄광선교를 위한 재정은 국내 선교지원금과 본인의 사재를 털어 충당했다. 그때까지 황지에는 중학교가 없었기에 이를 마음 아프게 여기었던 주교님은 황지 중고등학교 설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가난한 학생들의 영양공급을 위해 미국으로부터 젓소를 분양받아 태백유우관리위원회를 시작하여 암송아지를 되받는 방법으로 80여 마리의 젓소를 분양함으로 태백축산업의 전신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초창기 때에는 어려운 가정에 식량과 의류등의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였고,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의료사업이었다.
빈곤한 지역은 어디든 그렇듯이 병자가 많다. 이들은 돈이 없어서 또한 무지하기 때문에 혹은 심리적인 이유등으로 인해 병원에 가기를 기피한다. 그러기에 작은 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많은 병자들에게 태백교회는 성공회로 알려지기 보다는 보건소와 같이 약도 주고 진료도 해주는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위해 영국으로부터 여성 간호사 두분이 오랫동안 상주하며 진료를 맡게 되었다. 간단한 진료는 직접하였고 수술을 요하는 중환자들은 원주나 서울로 이송하여 무료수술을 받게 하는 등 의료혜택을 그 지역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방학중에는 서울 이대간호학교 여대생들 수명이 자원봉사하여 이동무료진료반을 조직하여 각 마을을 짚차로 돌며 진료와 위생 및 계몽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을 하시던 김요한 주교님께서 계속 사역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한국신부님들이 몇 분 오셔서 사목을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주교님의 사역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태백교회는 예수원 설립자이신 대천덕 신부님께서 주일날만 나오셔서 미사를 집전하셨고 전도사님들을 파송받기도 하여 얼마간 상주하는 등 쉽지않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86년부터 90년까지는 성프란시스 선교원으로 설립하여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나 폐광촌 합리화 정책과 학생부족, 교사부족으로 중단되었고, 그 후 1년 이상이나 상주자가 없는 어려운 상태에 91년도에 유테레사 전도사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담당하시게 되었다.
93년 7월 11일 유테레사 전도사님께서는 송별미사 후 12일 대전으로 이사가게 되었고, 주예레미야 신부님 가족이 8월 9일 태백교회로 이사하였다. 이당시 태백교회는 도시속에 있는 시골교회와 같은 어려운 상태로 예배드리는 인원이 고작 10∼15여명 이었지만,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꾸준히 나아갔다. 그러던 중 93년 8월 민홍분(헬레나) 자매님의 만성 신부전증으로 교회가 기도하며 노력하여 약 2천여만원의 수술비용을 모금하였고, 관할사제이신 주예레미야 신부님께서 비밀리에 신장기증을 계획하여 교회로부터 휴가를 얻어 94년 11월 24일 자신의 신장을 민헬레나 자매님을 위해 기증하였다. 사랑의 장기기증 본부에서는 수치가 맞지 않기 때문에 주신부님의 신장을 다른 맞는 분에게 기증하였고 민헬레나 자매님의 수치가 맞는 분을 찾아 95년도 6월 27일 사경에서 기적적인 신장이식수술이 이루어졌다. 민헬레나 자매님은 심장까지 약하여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조금씩 회복되어 금년이 수술 5년째 되는 해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
그 후 1년 조금 지난 96년 9월 27일 밤중에 전기누전으로 인해 교회가 완전전소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10여 가정에 30여명쯤 되는 가난한 교인들이 새 성전을 재건할 힘이 없었지만 작은 장소를 제공받아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려왔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태백교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어 약 5억원의 재정을 공급해 주심으로 1998년 10월 15일 새 성전 축성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불신자들은 교회사고를 보고 '이제 이 교회가 망했구나' 하는 생각했겠지만,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큰 일 하실 것을 믿었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신 말씀같이 새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게 되었다.
새 성전에서 99년 4월 6일부터 이 지역 가난과 가정불화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이웃들에게 방과 후에 공부방 및 놀이방, 급식을 베풀어 아픔에 동참하고 있으며, 재정이 허락하는 만큼 가난한 집에 쌀과 밑반찬, 과일등을 준비하여 배달하고 문제에 빠져있는 자들을 찾아가 상담하며 신나는 집으로 이끌어 교회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태백에서의 의료선교
김요한 주교가 사비로 세운 교육기관(현 황지중고등학교)
1968년 대전교구 의회에서 대천덕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