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초기 시무 성직자 조용호 신부

대한성공회 예산성당 2018. 4. 6. 02:51

조용호(디모데) 신부(1898~ 1950)

 - 6.25 동란의 성공회 순교 성직자 -

 

 

성공회 서울대성당 순교자기념 사진 속 조용호 신부

 

 

조용호신부는 성공회 성미가엘 신학원 제 10회 졸업생으로 1934년 9월 22일에 사제 성직에 올랐다. 그는 1898년 8월 15일 (음) 서울 남산골에서 아버지 조성규씨와 어머니 박유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용호 신부의  부친은 1884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있던 아펜 젤러 박사가 각 교파 선교사들과 같이 1887년 2월부터 시작했던 성서 번역 사업에 참여했던 분이다. 따라서 조용호 신부는 어려서부터 교회안에서 신앙생활에 익숙하게 되었고 , 특히 항일 운동에 부친이 참여했던 그 정신을 이어받게 되었다. 또한 청년 시절에는 YMCA 중등부에서 이상재 선생등에게 교육을 받았고,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와 릿교대학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성공회 신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성직에 오른 후 예산교회를 첫 부임지로 하여 청주,서울에서 시무하였고, 말년에는 인천에서 시무하였으며, 또한 성미가엘 신학원에서 원장 이도암 신부를 도와 강사로 성경과 교회사를 담당하여 성직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5시에 기상하여 기도 시간을 엄수하고, 짜여진 일과 시간에 따라 빈틈없는 생활을 하였다. 틈이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않는 학구열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전에 청주교회에서 근무할 때 상주교회 미사 집전을 위하여 자전거로 왕복하는 열정적인 사제였다. 신자 가정의 심방과 상담등 목회자로서의 근면성은 누구보다도 앞서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한 실력은 당시 인천의 미군정 사령관으로부터 비서로 일해 줄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말하기를 , "성직과 겸해서 일할 수 없다"고 거절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가난했던 성직생활로부터 그러한 좋은 대우를 물리친 그의 결단은 바로 세속적인 욕심을 초월한 성직자의 신념,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으나, 불과 출국 2개월 여를 앞두고 1950년 6.25가 터졌다. 조신부는 가족 친지들의 남하하자는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도암 신학원장은 신학원을 지키고, 자신은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천에 잔류하게 되었다.

 

 당시 유일한 신학생(조 프란시스)의 증언에 따르면, 7월 초순경에 후퇴하던 국군 4~5명을 숨겨주고 하룻밤을 재워 보내게 되엇다. 그런데 후에 가보니 소총이 몇자루가 버려져 있었는데 발각될까봐 성당 밭에 묻었다. 며칠 후 인민군이 몇명 들이닥쳐 성당 구내에 파묻힌 소총을 물어보지도 않고 숨긴 책임을 추궁 받았으며, 또한 하느님을 믿는 성직자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연행되었다. 그 후 1주일만에 서울로 압송 되었는데 영영 소식이 없으며 서울에서 순교 당한 듯하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신앙심은 어떤 타협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강직하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다가 순교 당하였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한성공회 순교자비,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