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약함의 신학

순교자(복자)를 기념하는 기억의 넓이

대한성공회 예산성당 2018. 5. 19. 22:23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그의 존재,

예산은 그의 첫 부임지였다.  

19434월 일제에 의해 예산교회는 폐쇄되고 유치원은 몰수된다.

그는 예산을 떠나 인천으로 갔다.    

인천성당에 머물면서도 늘 예산교회가 마음에 걸렸나보다. 

 

예산교회 출신으로서 성공회 사제가 된 유명희 사제에 의하면

 "조 신부는 예산교회를 떠나 인천성당에 있으면서 예산교회 소식을 들으니,

당시 예산교회의 부지가 꽤 컸는데 일본인 군수가 교회 부지 일부까지 군수

사택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다는 심상영 사모의 말씀에 몇 일을 고민하다가 

내려갔다와야겠다고 하며 비장한 다짐과 함께 예산에 내려와 군수와 담판을 지어

당시 교회 부지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고 심상영 사모의 전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 강직한 신앙은 결국 6.25 동란때 피난을 가지 않고 성당을 지키다가

연행되어 결국 순교로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서울대성당의 뜰, 6인의 순교자 기념비에 새겨져있다.

복자(福者)나 성지(聖地)같은 과분한 기념은 차치하고 

이름 한 줄의 넓이로도 그의 안식은 만족하리라.   

 

그를 생각하면 막막함이 먹먹함이 된다.

성당이 재건되면 조그마한 기념비를 세워드려야겠다.

"별세한 신자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안히 쉬게 하소서."

 

 

조용호 신부의 자세한 일생은 다음과 같다. 

http://www.skhyesan.kr/3?category=763457

 

 

 

 

1934년 세실 쿠퍼 주교의 방문기념 단체사진의 조용호 신부(앞줄 검정 캐석)

 

 

 

1937년 신명유치원 졸업기념과 조용호 신부

 

 

 

예산 신석리 성모니카교회 단체사진속 조용호 신부(사진 중앙 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