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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초기 시무 성직자 이원창 미카엘 신부

이원창(李源昶, 미가엘)사제(司祭) 약력(略歷)

- 6.25 동란의 순교 성직자 -

 

 

1930년대 이원창 사제

 

서울 출신의 성공회사제 이원창(李源昶, 미가엘, Michael Yi)1883323일 적선동에서 출생하였고 1911330일 곽경복(郭慶福)과 혼인해서 슬하에 62녀를 두었으며 1921925일 부제(副祭) 서품을 받았고1923923일 사제(司祭) 서품을 받은 분으로 그가 서울전도구 사제로 있을 때 당시 서울의 수녀들이 운영하는 유치원 교사였던 이부비를 인도하여 수녀원지원자가 되게 하여 1925914일에 성가수녀원이 문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지역의 총감사제로서 자손과 다른 사제들을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하면서도 자신은 그대로 평양에 남아서 신도들을 돌보다가 순교(殉敎)의 길을 택하신 분으로 추앙(推仰)받고 있는데 그의 약력(略歷)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83323: 서울 적선동에서 출생(부 이승현, 모 김씨).

*1901-1921: 성공회 주교(主敎) 서기로 근무.

*1911330: 서울 적선방 곽경복(郭慶福; 부 곽태현, 모 백씨)과 혼인.

*19111225: 장남 이은상(李殷相) 출생.

*191399: 차남 이민상(李玟相) 출생.

*1916314: 장녀 이난희(李蘭姬) 출생.

*1918815: 3남 이면상(李冕相) 출생.

*192166: 차녀 이정희(李貞姬) 출생.

*1921925: 강화읍성당에서 부제서품 받고 서울전도구에서 시무.

*1923923: 서울장림성당에서 사제서품 받고 보좌사제 겸 주교비서로 시무하면서 당시 수녀들이 운영하는 유치원교사 이부비를 인도하여 1925914일 수녀원 지원자가 되어 성가수녀원이 창립되도록 한 천거사제가 되었음.

*192456: 4남 이현상(李賢相) 출생.

*19255: 진천교회 관할사제.

*19268: 서울교회 보좌사제.

*1927115: 5남 이보상(李輔相) 출생.

*19295: 평양전도구 보좌사제.

*1930428: 장남 이은상(李殷相) 사망.

*1930616: 6남 이필상(李弼相) 출생.

*19308: 서울대성당 조선학분야 담당사제.

*193168: 6남 이필상(李弼相) 사망.

*19328: 송천교회 관할사제.

*19332: 충주교회 관할사제.

*19368: 평양교회 관할사제.

*19403월경: 잠시 예산교회 관할사제를 겸임했다가 평양으로 복귀함.

*194911: 평양교회 관할사제 겸 북부 총감사제.

*19511: 평양 철수 시 남행 권유를 사양하고 순교자적인 사목(司牧)의 길을 걸었음.

 

[출처] 이원창(李源昶, 미가엘)사제(司祭) 약력(略歷)|작성자 한수당

 

 

 

 

이 원창(미카엘) 신부    : 1872~1950

 

이원창 신부는 성 미카엘학원(성공회 신학교 전신) 제4회 졸업생으로서 서울 마포에서 아버지 이구현씨와 어머니 김씨의 2남1녀중 차남으로 1872년 3월 23일 (음)에 태어났으며 어릴때부터 총명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이 미카엘 신부는 일찍이14세에 부친을 잃었으며 가장을 잃고난 후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집이 가난하여 밤에 공부를 할 때에 등잔불이 없어 대신으로 반딧불을 모아 그 불빛으로 면학 했다고 전해진다.그의 청년 시절에는 초기 YMCA 총무를 역임한 신흥우씨등이 다니던 경성 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후에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성공회 초대 교우였던 이미카엘 신부는 성공회 주교였던 고요한(Charles John corfe;1889~1904) 주교를 비롯하여 제2대 주교 단아덕 (Arthur Beresford Turner ;1905~1910) 주교, 그리고 조마가(Mark Napier Trollope ;

1911~1930) 주교의 비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가난한 자신의 생활과 가중되는 일본의 잠식과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그의 믿음으로 이겨 나갔다.

 

그리하여 그는 1923년 9월 23일에 서울대성당에서 사제 성직 서품을  받고, 성직자로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품을 받은 후 서울대성당에서 시무하면서 휘문학교의 영어 교사직을 맡았었다. 그는 후에 이북에 있는 성천교회에서 근무한 바도 있었으나, 1932년부터 충주 성 베네딕드교회에서 시무하였고, 그후 여주교회에서 관할사제로 시무하였며, 1940년대 세계 제2차 대전이 극도에 달했을때에 평양교회 관할사제로 부임하면서 그 지역 일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데 선도적 역할을 다 하였으며, 그 지역 총사제직을 맡아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평양교회.성천교회,선천교회,전남포교회,백천교회,순천 자산교회,순천 장래동교회, 해주교회, 평남 신성천교회, 평남 성천 석전리 성알반교회,성천 지상1리 성안드레교회,성천 오은골 성요한세자교회,평남 순천 용화리 성신교회,순천 동림리 성스테반교회,순천 임강리 성도마교회,황해도 평산 온정 성모니카교회,평남 백천 유천리 성바우로 교회,평남 김천 용연 성미카엘교회,평남 순천 도흥리교회,평남 신창교회등 20여개의 교회릉 설립하고 축성하는데 총사제로서 모든 재능과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들 교회를 바탕으로 성공회 평양교구 설립을 준비할만큼 교세가 번창하였다.

 

그는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도 평양에서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최후의 신자가 있을때까지 자신은 교회를 지켜야한다고 결심하고,모든 가족을 월남 시키고, 또한 당시 평양지역에서 총사제를 도와 사목 활동을 하였다.  주장훈(바우로) 신부,최태희(디모데)신부,이정호(누가)신부등을 남하시키면서도, 자신은 끝까지 성전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원창신부는 당시의 공산 지배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곧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올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하더라도 교회를 지켜 나가야한다고 믿고 실천하여 나갔다.

 

 그 후 9.28 수복으로 평양이 수복되었을 당시 군에 복무하였던 고 이두성씨가 만나 남하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때도 당신은 현지의 교회에 남아서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해야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그 후에 전 이북지역이 감옥으로 화한 상태에서 이원창 신부가 순교당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 선교 백년의 증언에서 옮김 -

 

 

 

1950년 순교한 분을 위해 1990년 세워진 순교추모비

 

대한성공회서울대성당 남동쪽에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순교하신

6분의 거룩한 죽음을 기리고자

추모의 마음을 모아 순교추모비를 1990926일 한인치명일에

성공회 선교100주년을 맞이하여

선교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세웠습니다.

6분의 순교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원창(미카엘, 1883-1950)신부

마리아 클라라(Mary Clare, 1883-1950)수녀

홍갈로(Charles Hunt, 1889-1950)신부

윤달용(모세, 1890-1950)신부

이도암(Albert W. Lee, 1893-1950)신부

조용호(디모데, 1898-1950)신부

순교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그 믿음을 본받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