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래된 기억

1930년 신명유치원 기사(매일신보)

1932년 12월 06일 완공된 신명유치원 전경(출처: 성공회대학교 역사자료관)



禮山初有의 音樂大會 : 수입은 신명유치원의 경비로 보조

예산 신명유치원 학부모회에서는 지난 팔일 오전 칠시에 예산 공립보통 학교 대강당에서 음악대회를 개최하얐는데 이화여전 교수 安基英씨, 중앙보육 학교 음악주임 洪蘭坡씨의 출연과 유치원 아동창가 십종과 예산자유악단 일동의 바이올린 합주와 예산청년 일동의 하모니카합주로 예산초유의 음악회로 대성황을 정(呈)하였는데 수입은 경비를 제하고는 전부 동유치원 경비의 보조에 충용하엿다.  

-매일신보 1930년 2월 14일 3면 기사|-



[특별기고―신도성]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

기사입력 : 2004.08.17, 15:18
광복 59주년인 올해 8월은 한국 교회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신지 63주기가 되는 달이다. 189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1941년 8월30일 늑막염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던 홍난파는 우리에게 서양음악의 선구자로만 널리 알려져 있으나 기독교가 도입되는 초기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음악에도 큰 기여를 한 분이다.
 

새문안교회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11년 7월13일 세례를 받았고 집사가 되어 당시 의사였던 형 홍석후와 함께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12월16일에는 제직회에 참석해 성탄축하식 준비를 위한 예배당 장식위원으로 봉사했으며 특히 새문안교회 찬양대와 관현악대에서 김영환 김인식 김형준 홍성유 독고선 등 당시 음악계의 대표적인 인물들과 함께 그의 음악적 재량을 발휘,봉사했다. 그는 1931년 7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서 찬양대 인도를 사임했다.

그는 새문안교회 찬양대 뿐 아니라 교회 외부 찬양대 음악회 때도 바이올린 연주 등으로 전도 활동에 적극 나섰다. 1912년 한해 동안 30회 이상 교회를 순회하며 연주했고 1914년 중앙기독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8월30일에는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경성찬양회가 주최한 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같은 해 12월23일에는 예수탄생축하 경축 대음악회,1924년 5월6일에는 한강교회 유년주일학교 주최 음악대회에서 역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벌였다. 또 1930년 2월8일에는 예산 신명유치원 학부모회 주최로 열린 예산공립보통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해 수익금을 지역 사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홍난파는 피아니스트 김원복씨의 반주에 맞춰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주함으로써 한국에 기독교가 도입되던 초창기 교회음악과 서양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민족혼이 살아있는 음악을 작곡해라. 너만의 음악을 해라.” 일제시대에 동아신춘문예 작곡부문 심사위원이었던 그는 당시 당선자였던 나운영에게 이런 당부를 했고 훗날 나운영은 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예술가곡과 교회음악을 크게 꽃피웠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홍난파의 평가가 둘로 나누어져 있음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홍난파’ 한 인물을 평가하기에 앞서 그의 일대기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여러 방면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4년 8월 18일 자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