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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약함의 신학

고 김요한 주교 (Bishop John Daly)의 새로운 사진과 문장




대한성공회 5대 주교님이셨던 고 김요한 주교님(Bishop John Daly)의 문장과 새로운 프로필 사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문장과 사진은 저도 처음 보는 것인데 고 노정빈(로버츠 조세핀) 선교사님의 생애와 관련된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동기 신학생이 우연찮게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김요한 주교님을 생각하면 참된 사목자의 모본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분이 한국에서 펼치셨던 강원도 황지의 탄광촌 선교와 영등포 공단에서의 산업선교는 대한성공회뿐만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에서도 훌륭한 선교의 발자취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인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 주교들을 미리 양성하셨던 점은 토착화된 교회를 향한 탁월한 선교적 식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이 분을 주목하는 것은 회고록에서 밝힌 선구적인 선교관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호사업은 거의 지방 행정기관을 통하여 그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것은 종교기관이 베푸는 동정심이 아니며, 또한 물질을 방편으로 종교를 갖게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게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이 등장한게 1952년 빌링겐 세계선교회의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60년대에 이미 이런 사회선교를 한국에서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인식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양적 팽창과는 거리가 멀었던 성공회의 선교방식때문인지 성공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보잘것없이 미약한 교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댓가없는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시고 이제 하늘에 별이 되신 존 데일리 주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관구설립을 앞두고 발간된 책 '선교 100년의 증언'에 수록된 김요한 주교님의 기고글입니다.


내가 대한성공회에서 12년간 시무하면서 겪었던 일과 또한 지금까지도 잊지못하고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몇년동안 황지에서 탄광촌의 우리 이웃을 위해 지냈던 그때의 생각들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내가 지금까지의 성직자 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근로자와 특별히 탄광촌의 광부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또한 복지사업을 벌여온데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

1927년 사제품을 받고 6년간이나 시무한 곳이 영국의 광산 지대인 '에어타일' 지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의 목회생활 직후 1935년 32세의 나이로 주교가 되어 20년간 잠비아와 아크라등 아프리카 지역에서 사목 기간을 가졌다. 이러한 사목 생활을 통하여 나는 어렵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구체적인 활동에 임하고는 하였다.

1955년 한국성공회 교구장 주교로 전임 발령을 받고 한국에 도착한 나는 6.25 전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여서 교회내의 여러가지 일들은 물론이려니와 교회 밖에서도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산업전도에 대한 활동이 없었는데, 한국 교회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가 있을때마다 이야기 하였으며, 나는 한국의 대표적인 광산지대인 황지에서 선교활동을 가져보고자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야기하는 선교활동이란 비단 교인을 만들어 성공회 교세를 늘리자는 것 분만 아니라, 광부들과 그 가족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고,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등 복지 사업에 중점적인 목표를 삼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62년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영국에 가지고 있던 나의 재산을 팔아 성당을 세우고,구체적인 산업선교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역시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교육시설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나는 이석형(요한), 오용삼(다위) 그리고 한사람 등 우리 사업에 동참하기 위하여 자원한 세사람의 청년을 만날 수 있었으며, 만약 이러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제일 먼저 공민학교를 세웠다. 광부들 가족중에는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생활때문에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를 세운지 얼마되지않아 어떠한 일 때문에 공민학교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나마 그 공민학교는 곧 다른 성격의 기관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당시에 나는 실망도 컷으나 나의 사목활동의 목표를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시작했다. 토지를 구입하고, 학교교사를 건축하고 중학교를 설립,앞으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정부에 기증하였다. 그후에 듣기로는 '황지중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지역사회 교육에 크게 이바지할 만큼 크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전도활동을 열심히 펼쳐나갔다. 광산촌에 다닐때는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그러나 가파른 산길을 다녀야 했으므로 자전거도 산 중턱까지 밖에 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낮은 임금 때문에 생활고를 겪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 보다는 우선적으로 물질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식량과 의류등 생활필수품의 지원책을 강구하고 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지원활동은 국내외에 있는 구호사업기관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이 구호사업은 거의 지방 행정기관을 통하여 그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것은 종교기관이 베푸는 동정심이 아니며, 도한 물질을 방편으로 종교를 갖게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게하기 위해서였다.

또 전도활동을 가지면서 꼭 성공회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교회에 나가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늘 말하였다. 우리가 황지에서 가졌던 특수선교활동 중에는 의료선교를 빼놓을 수 없다. 각 광산촌에 다니면서 간단한 치료를 해주거나 또한 교회에 설치한 진료소를 통하여 진료활동을 가졌다. 이 의료활동을 위하여 영국인 고화영(Fannie Storr), 위진수(Jean Wiblin) 두 간호원이 수년간 이곳에서 진료활동을 가졌으며, 또한 많은 구호품과 의약품을 게속 공급해주던 노정빈(Josephine Roberts) 씨를 잊을 수가 없다.

노정빈씨는 여러가지 물건을 싣고 차량(랜드로버)을 직접 운전하여 황지에 오곤했는데, 서울에서 황지까지의 도로는 한국에서도 험악하기로 이름난 길이다,(현재는 다르지만) 특별히 황지지역에 다다르게되면 그 정도가 대단한 것이다. 관광길이 아니라 석탄을 실어나르는 트럭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다. 꼬불꼬불한 급회전 도로이며, 여름비로 진흙탕이 되기도 했고 겨울에는 눈과 얼음으로 위험했다. 더구나 광산촌에서의 좁은 길에서 마주 오는 트럭을 만날때는 정말 난처하기 이를데 없는 경우가 된다. 노정빈씨는 어느날 밤 광산촌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왔다.그 아기 어머니가 출산하다가 숨졌다는 연락을 받고 그 아기를 데려온 것이다. 정성껏 보살피다가 얼마 후 어느 천주교 신자의 가정에 입양시킨 일이 있다.

황지지역에서 우리가 벌여온 활동 중 젖소 분양 사업이 있다. 좀 더 생산성있는 지원활동을 갖기 위해 생각한 것이 이 젖소사업이다. 암소를 사서 어느 가정에 주면, 그 사육자는 새끼를 낳을때 그 송아지를 우리에게 주고, 우리는 다시 그 송아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불과 몇마리를 가지고 시작한 이 사업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까지 한국성공회의 교구장직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황지에서 전개하였던 산업선교의 이야기를 하였지만 주교로서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한국성공회를 서울 교구와 대전교구로 분할하고, 서울 교구장에 첫 한국인 주교가 취임한 사실이다. 한국 교회는 한국인에 의한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은 한국 교우들의 뜨거운 염원이었으며 , 또한 나의 소신이기도 하였다.

이제 대한 성공회는 선교 백주년을 맞이 하였고 관구 설립을 눈앞에 둔 시점에 서있다.

 

 - 1990년 선교 백년의 증언에서 -



- 김요한 주교(1901.1.13-1993.8.15) 약력 -

런던출생,  캐임브리지대학 수학

더럼교회에서 사제서품

1935.5.1 런던 제성인교회에서 주교서품

감비아, 가나에서 20년간 주교직 수행

1955.12.24 대한성공회 5대주교 취임

1965.05.27 대전교구 초대주교 취임

1968.1.14 퇴임

1993. 8.15 영국에서 별세

'자정', '자립', '자전'의 3자 운동전개, 나환자들을 위한 성생원 설립, 황지 탄광촌 선교, 영등포산업선교등을 주도하였고, 특별히 한국인의 의한 토착화된 교회를 추진하여 첫 한국인 주교를 선출하였다.